마. 우이구르제국(오르콘제국)

우이구르(Uygur)족은 당나라 때에 회골이라 불리웠으며, 송, 원나라 때에는 오외아(畏吾兒)라 불리웠다. 돌궐제국 시대에 우이구르 부족은 독립된 독자적인 부족 집단을 이루고 셀렝가 강 유역에서 거주해 왔다. 원래 유목민족이었던 이들은 튀르크계 부족으로서, 중국과 우호적이며 돌궐제국과는 적대적이었던 퇼뢰스(Tölös) 부족 연맹에 속해 있었다.

 돌궐의 마지막 카간이 사망하고 수 년후에 튀르크의 일종인 우이구르(Uygur)족이 745년 돌궐의 지배층을 물리치고 경쟁 부족 세력을 제압하여 새로운 제국을 수립하였다. 우이구르제국의 건설자는 쿠틀루그 빌게 카간(Kutlug Bilge Kagan: 骨力裵羅)으로 알려져있고, 오르콘(Orkhon)강 유역의 중앙스텝을 지배하였다. 쿠틀루그 빌게가 건설한 제국은 흔히 오르콘제국이라 불리우며, 우이구르민족이 세운 수 개의 제국들의 효시가 되었다.  돌궐이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 감에 따라 당나라는 628년에 우이구르 집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여 친근관계를 강화하였다. 우이구르는 당시 부족장을 에르킨(Erkin)이라 칭했다.

 우이구르족은 도쿠즈오우즈라 불리는 9개의 부족 집단을 형성하여 제국을 설립하였기 때문에 중국 등 주변 국가들에게 10개 부족을 의미하는 말로 온오구르(Onogur)라 불리기도 하였다. 친중국계 우이구르 부족의 집권으로 당시 상징적이나마 존재해 있던 튀르크 부족들간의 통일 형태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 후 민족 의식과 전통이 강한 대부분의 돌궐계 부족 연합체들은 각각 집단을 구성하여 서부스텝과 러시아의 스텝지대로 진출하였고, 우이구르만이 중앙아시아의 중심 지역에 남게 되었다.

 한편, 우이구르제국이 중국과 선린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중국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이구르제국과 중국의 관계는 대체로 평등관계에 있었으며, 도리어 중국 조정이 어려울 때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우이구르제국이 도와주는 입장에 있었다. 당나라 천보(天寶)시대 때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발하여 당조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을때, 757년, 우이구르군이 수도 장안까지 진군하여 당조를 구해주기도 하였다.  745년부터 840년 까지 백년가까이 존속한 우이구르제국은 실질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중심 지역에서 동서의 교역을 통제하는 제국이었다. 오르콘제국은 840년 키르기즈(Kyrgyz)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거의 1세기동안 동부 및 중남부 스텝지대를 지배하였다.    

 우이구르제국의  수도는 카라발가순(Kara Balgasun)이었으며 사회구조는 유목사회와 영농 정착사회의 특징을 혼합한 형태였다. 이 제국은 759년부터 779년까지 최극성기를 가졌는데, 이 때의 우이구르 판도는 알타이산맥으로부터 바이칼호에까지 이르렀다.

 우이구르는 중국의 對중앙아시아 민족교섭사에 있어서 독특한 관계를 수립하였다. 즉 유목민족의 배경을 가진 우이구르와 중국이 우호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 하다.  두 제국이 이같이 우호관계를 가지게된 근본적인 이유는 우이구르는 경제적인 필요를 중국에 의존해야 했고, 중국으로서는 우이구르의 군사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중국은 당나라 말기였으며, 군사력이 미비한 관계로 북방 스텝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우이구르로 하여금 중앙스텝을 지배하도록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중국과 선린관계를 유지한 우이구르가 한 군사적 행동은 주로 티베트에 대한 것이었다. 우이구르는 감수협곡을 침입하여 중국과의 교역을 단절시키려는 티베트제국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해  822년 이후에는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즉, 원주민과 소수 인도유럽계 부족들을 압도하여 튀르크계 부족들이 실크로드 요충지에 침투 정착하게 되어, 튀르크계 언어와 문화가 그 지역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스텝의 서부 사마르칸드와 부하라지역에는 AD 4세기때부터 페르시아계의 소그드인(Sogdian)들이 살면서 비단길의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과 통하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우이구르와 교역상의 이유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점차로 우이구르에 흡수되어 튀르크족화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그드인들은 우이구르인들에게 마니교(Manicheism)를 전해 주었다6). 762년 우이구르 카간 뵈귀(Bögü)는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마니교는 우이구르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유목민족 최초로 집단적으로 정착민 종교를 갖게되면서 우이구르인들의 정착화는 가속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우이구르인들은 선대의 고지(故地)인 산악지대로부터 정착을 위해 스텝의 평야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앙아시아 유목 민족으로서는 최초로 성곽도시를 건설하였다. 우이구르인들의 관개농법을 이용한 영농기술이나 뛰어난 프레스코벽화의 기법은 소그드인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우이구르인들은 정착화 과정을 거치면서 스텝 민족의 특성을 많이 잃게 되었고 결국 군사력도 약해지게 되었다. 우이구르인들은 마니교 이외에도 불교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러한 정착민 종교들이 육식을 금하게 하고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등 우이구르인들의 세계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약화된 우이구르는 840년, 알타이산맥 북부 스텝에 할거하던 전통적 유목민족이었던 키르기즈족에 의해 멸망당했다. 키르기즈는 우이구르 침략에 성공할 정도로 강력한 부족 연맹이었으나 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 대부분의 유목민족 집단이 그러했듯이, 전통적인 유목민족으로서 도시건설과 정착화를 통한 국가 건설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키르기즈 승리의 특기할만한 역사적 의의는 중앙스텝지대를 정착화된 우이구르인들의 영향으로부터 차단했다는 데 있다. 패망한 우이구르족은 유목민족으로 되돌아가지 않았고, 키르기즈에 흡수되지도 않았다. 우이구르족의 오르콘 제국은 여러 개의 다양한 씨족 연맹으로 분열되어 각각 상이한 방향으로 분산되었다. 몇몇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를룩과 대치했고, 몇몇은 중국으로 대피해 감주지방의 최서부 지역에 정착하여, 9세기 중엽에는 감주국, 사주국, 고주국 등 소왕국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중국은 당시 당의 쇠퇴기였고, 티베트 역시 붕괴되어 이들 우이구르 공국들의 존속에 위협을 주지는 않았다. 중국은 당에서 송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으나, 우이구르 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며 교역 관계도 지속되었다.

 한편, 이 교역을 방해하는 부족이 있었으니, 바로 티베트계 탕구트였다. 중국과 우이구르 부족들간의 교역에 대한 탕구트의 방해는 초기에는 약탈 행위로 시작하여 10세기말엽에는 전면적인 침략으로 발전되었다. 이 당시 중앙아시아의 교역로는 탕구트(Tangut)와 거란(Khitan: 契丹) 등이 지배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는데, 11세기초에 탕구트는 지배권을 확보하고 몽골에 의해 정복당하기까지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우이구르제국의 문화는 정착문화와 유목문화의 혼합(synthesis)으로서 다이나믹하면서 적응성이 강했다. 이러한 우이구르 문화는 후에 그 지역에 형성되었던 튀르크-몽골 사회에 심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우이구르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마니교는 우이구르족의 도시화와 정착화를 이루게 하였을 뿐만아니라, 문자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우이구르인들은 스텝 민족사상 최초로 문학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 마니문자는 후에 몽골제국의 초기 문헌기록을 담당하였다. 우이구르 문명의 최극성기는 오르콘제국 멸망 이후 우이구르인들이 불교를 신봉했을 때였다. 이들은 이 때에 불교의 영향아래서 프레스코벽화를 발전시켰다. 우이구르 왕국들이 중국과 이란 문화권의 교차점에 위치했던 까닭에 우이구르의 미술과 건축은 두 문화의 성격이 혼합된 독특한 양상을 나타내었다.

 우이구르에 관한 당시의 경제, 사회 생활의 기록을 보면 스텝 제국의 여성들이 영농 정착 국가의 여성들보다 월등한 권리와 자유를 누렸음이 나타난다. 또한 우이구르의 제도는 각 직책과 임무가 선대 돌궐보다 잘 규정되고 발전된 형태를 가졌었다. 우이구르 문명은 확실히 스텝 지역에서 이례적이었으며, 뒤에 오는 튀르크-몽골 사회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정치적 야망과 스텝 유목민족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정착화가 이루어질 수 있고 문자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